배달 기사를 노동자로 분류하지 않고 보호한 호주 방식

호주가 8월 17일부터 배달 플랫폼 노동자에게 법적 구속력 있는 최저기준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을 근로자로 분류하지는 않았습니다. 호주는 신분을 그대로 두고 보호만 떼어 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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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식 없는 배달 가방을 실은 오토바이 옆에서 기다리는 사람.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입니다.
표식 없는 배달 가방을 실은 오토바이 옆에서 기다리는 사람.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입니다.
목차 · 9개 단락
  1. 무엇을 했나
  2. 이들은 여전히 근로자가 아닙니다
  3. 법이 ’못 다루는 것’까지 적어 두었습니다
  4. 신분과 보호를 떼어 놓았습니다
  5. 한국과 무엇이 다른가
  6. 그대로 옮겨오기 어려운 점들
  7. 제가 틀릴 수 있는 지점
  8. 자주 묻는 질문
  9. 답이 둘뿐인 질문을 비켜 간 설계

호주가 8월 17일부터 배달 플랫폼 노동자에게 법적 구속력이 있는 최저기준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을 근로자로 분류하지는 않았습니다. 신분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플랫폼 노동을 둘러싼 논쟁은 20년 가까이 같은 질문을 맴돌았습니다. 배달 기사는 노동자인가, 독립계약자인가.

이 질문에는 답이 둘뿐이고, 어느 쪽으로 답하든 그 뒤가 통째로 따라옵니다. 노동자라고 하면 최저임금·연차·퇴직금·부당해고 구제가 한꺼번에 붙고, 계약자라고 하면 그중 거의 아무것도 붙지 않습니다. 호주는 그 묶음을 풀었습니다.

무엇을 했나

호주 공정근로위원회가 배달 플랫폼 노동자를 대상으로 법적 구속력이 있는 최저기준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기구가 이 제도로 낸 첫 명령입니다.

  • 대상: 앱이나 웹을 통해 음식·음료·주류·식료품을 배달하는 사람. 적재량 1톤을 넘는 차량을 쓰는 경우는 제외
  • 보수: 시간당 최저 기준
  • 보험: 플랫폼이 개인상해보험을 제공하고 비용도 부담
  • 차량 비용: 노동자가 부담하는 차량 관련 비용에 관한 기준
  • 기록 보관, 분쟁 해결 절차
  • 직장 대표: 교육 시간에 대해 시간당 32호주달러(약 3만 원) 유급
  • 정보 제공: 플랫폼이 노동자에게 안내문을 주어야 함

운수노조는 “역사적 순간”이라고 했고, 우버이츠는 “현대적 일하기 방식에 맞는 현대적 개혁”이라며 “공정한 기준과 유연성은 양립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도어대시도 환영했습니다.

여기서 이상한 점이 하나 눈에 띕니다. 플랫폼 기업들이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근로자가 아닙니다

이 제도의 핵심은 여기 있습니다.

호주는 이들에게 ’employee-like worker(근로자 유사 노동자)’라는 별도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공정근로옴부즈만의 안내문은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들은 계약자로 남습니다. 근로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받는 것과 못 받는 것이 갈립니다.

‘근로자 유사 노동자’가 받는 것과 받지 못하는 것
받는 것
최저 보수 기준 보험 부당 계정정지 보호 불공정 계약조건 보호 직장 대표권 분쟁 해결 절차
받지 못하는 것
부당해고 구제 유급 휴가 근로자 지위

’노동자로 인정했다’가 아닙니다. 필요한 항목만 골라서 붙였습니다.

법이 ’못 다루는 것’까지 적어 두었습니다

더 인상적인 대목이 있습니다. 이 최저기준명령이 무엇을 다룰 수 있고 무엇은 다룰 수 없는지가 법에 열거돼 있습니다.

최저기준명령의 권한 범위
다룰 수 있는 것
보수 지급 조건, 공제, 기록 보관, 보험, 협의, 대표, 대표자의 권리, 비용 보전, 분쟁 해결
다룰 수 없는 것
초과근무 수당, 근무 일정 편성, 상업적 사항, 계약 형태의 변경, 다른 법이 관장하는 산업안전 사항

’계약 형태의 변경’이 금지 목록에 있다는 점이 특히 중요합니다. 위원회는 기준을 정할 수 있지만, 이들을 근로자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신분은 애초에 이 절차의 권한 밖에 놓아둔 것입니다.

책상 위에 나란히 놓인 높이가 다른 두 종이 더미와 그 사이의 펜
붙일 항목과 붙이지 않을 항목을 따로 정했습니다.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입니다.

신분과 보호를 떼어 놓았습니다

여기서 구조가 보입니다.

기존 방식에서 신분은 꾸러미였습니다. 근로자라고 판정되면 보호 항목이 한꺼번에 딸려 옵니다. 그래서 판정 자체가 전부를 건 싸움이 됩니다.

호주가 한 일은 그 꾸러미를 푼 것입니다. 범주를 하나 새로 만들고, 그 안에 어떤 항목을 넣을지를 따로 정했습니다.

그러면 논쟁의 대상이 바뀝니다.

  • 기존: “이 사람은 근로자인가” — 예 또는 아니오. 이기거나 집니다
  • 이후: “시급을 얼마로 할 것인가” — 숫자. 협상이 됩니다

신분 논쟁은 타협이 안 되고, 수준 논쟁은 타협이 됩니다.

앞에서 이상했던 대목이 여기서 풀립니다. 플랫폼 기업들이 반대하지 않은 이유 말입니다. 이 제도는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 모든 배달 기사가 근로자가 되는 시나리오 — 를 오히려 법으로 막아 두었습니다. 그 대가로 기준을 받아들인 셈입니다.

그러니 이 합의는 노동 쪽의 완승도, 사용자 쪽의 방어도 아닙니다. 양쪽이 각자 가장 무서워하던 결과를 지운 거래에 가깝습니다.

한국과 무엇이 다른가

한국도 사실 항목별로 붙여 왔습니다. 특수형태근로종사자에게 산재보험과 고용보험은 적용되지만 근로기준법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미 꾸러미를 푼 셈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대상을 정하는 방식입니다.

한국 호주
대상 판정 직종 열거 — 보험설계사, 택배기사, 학습지 교사, 골프장 캐디처럼 법에 직종을 하나씩 적음 기준 판정 — 교섭력이 약하다, 보수가 근로자보다 낮다, 일하는 방식을 스스로 정할 권한이 적다. 이 가운데 둘 이상에 해당하면 직종과 상관없이 보호 대상
항목 추가 법률 개정 필요 위원회의 명령으로 가능
논쟁의 초점 근로자성 인정 여부 (개별 소송) 기준의 수준

한국 방식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이 나타나면 법을 고쳐야 합니다. 그 사이에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어느 명단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명단에 들어가려면 다시 ’이 직종을 넣을 것인가’라는 정치적 협상을 통과해야 합니다.

호주 방식에서는 기준이 사람을 찾아갑니다. 직종 이름이 아니라 일하는 조건으로 판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옮겨오기 어려운 점들

이 모델을 정답으로 보기는 이릅니다. 한국에 옮긴다면 걸릴 대목이 몇 가지 보입니다.

첫째, 국회가 어디까지 맡길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호주 공정근로위원회는 법원은 아니지만 분쟁을 심리하고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리는 기구입니다. 호주는 시급을 얼마로 할지 같은 구체적인 내용을 이 기구가 정하도록 넘겼습니다. 한국에서 비슷한 기구에 그런 권한을 주려면, 국회가 정할 일을 어디까지 넘겨도 되느냐를 두고 별도의 논쟁이 벌어질 것입니다.

둘째, 기준이 상한이 될 위험입니다. ’최저’라고 이름 붙였지만, 실무에서는 그 숫자가 표준이 되어 그 이상을 요구하기 어려워지는 경우가 흔합니다.

셋째, 이번 명령은 임시(interim)입니다. 이름 자체가 ’임시 주문형 배달 근로자 유사 노동자 최저기준명령’입니다. 확정 단계에서 내용이 달라질 수 있고, 아직 이 제도의 효과를 평가할 자료도 없습니다.

제가 틀릴 수 있는 지점

  • 시행 2주 차입니다. 제도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자료가 아직 없습니다. 설계를 읽었을 뿐 결과는 아직 못 봤습니다.
  • 플랫폼이 환영한 이유를 제가 추론했습니다. ’근로자화를 막는 대가로 기준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발표문에서 읽어낸 해석이고, 협상 과정을 확인한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규제 확실성을 얻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 한국의 특고 제도를 단순화했습니다. 직종 열거 방식이 주된 틀이지만, 개별 판례로 근로자성이 인정되는 경로도 있고 최근 적용 범위도 계속 조정돼 왔습니다. 표는 큰 틀을 견주려고 만든 것이라 제도를 정밀하게 비교하지는 못합니다.
  • ’수준 논쟁이 타협된다’는 것은 일반론입니다. 실제로는 숫자를 두고도 오래 싸울 수 있고, 호주에서도 앞으로 그럴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호주 배달 기사는 이제 근로자인가요?

아닙니다. 계약자로 남습니다. 다만 최저 보수, 보험, 부당 계정정지 보호 같은 일부 보호를 법적으로 받게 됐습니다.

Q. 그럼 반쪽짜리 아닌가요?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유급휴가도, 부당해고 구제도 없습니다. 다만 기존에는 그중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평가는 ’근로자에 비해 무엇이 없는가’로 볼지, ’이전에 비해 무엇이 생겼는가’로 볼지에 따라 갈립니다.

Q. 한국에서도 비슷한 게 가능한가요?

이미 부분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산재보험과 고용보험이 그렇습니다. 차이는 대상을 직종 이름으로 정하느냐, 일하는 조건으로 정하느냐입니다.

Q. 플랫폼 기업이 왜 찬성했나요?

발표문만으로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 제도가 ’전원 근로자화’를 법적으로 막아 둔 구조라는 점은 사실이고, 규제의 내용이 예측 가능해진 것도 기업에는 이득입니다.

답이 둘뿐인 질문을 비켜 간 설계

’노동자냐 아니냐’는 질문은 답이 둘뿐이라 잘 끝나지 않습니다. 걸린 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호주는 그 질문에 답하는 대신, 신분과 보호를 떼어 놓았습니다. 근로자로 만들지 않으면서 보호 항목을 하나씩 붙였고, 무엇을 붙일 수 없는지까지 법에 적었습니다.

그래서 싸움의 대상이 ’누구인가’에서 ’얼마인가’로 옮겨갔습니다. 앞의 질문에는 승패만 있지만, 뒤의 질문에는 협상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 언급한 공개 자료
사색가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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